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끄적끄적

82년생 김지영 소설은 추천하지만 영화는 추천하지 않는 이유

by modequeen 2021. 12. 11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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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이 소설에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여자가 당한 일들이 아니라 왜 여자가 극단적인 말하기 방식을 취하게 되었는가라고 생각해요. 소설 대부분을 김지영씨가 당한 일들을 지지부진하게 늘어놓는 데 할당해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 이야기들은 그저 마지막 챕터를 보여주기 위해 올라간 계단이라고 생각해요. 그래서 그 마지막 챕터를 빼버린 영화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고 페미니즘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해요.

 사실 저는 지영씨의 언니와 같은 성격이라 지영씨가 당한 일들과 비슷한 일들을 당했으면서도 지영씨에게 공감할 수 없었어요. '도대체 언제까지 참고 살 거야? 본인을 그렇게 대해도 되게 해놓고 왜 원망하는데?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뭐가 바뀌는데?'라고 화를 내면서 도중에 책을 덮었어요. 부당한 일에 맞서야 뭐라도 변하는데 그 자리에서는 참았다가 나중에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원망하면 무슨 소용인가 싶었어요.

 그러다가 영화가 개봉하기 전 한참 이슈가 될 때 많은 외국인 친구들이 이 소설을 극찬하고 영화도 같이 보러 가자고 해서 뒤에는 다른 내용이 있나 싶어서 책을 다시 폈어요. 그렇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지영씨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.

 마지막 챕터에 지영씨를 치료한 남자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가 나와요. 이 남성은 자신의 환자인 지영씨에게도 공감하고 자신의 아내가 여자로서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도 깊게 이해하고 있어요. 그런데 고용인인 여자 간호사에게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여성혐오 발언까지 해요. 이부분에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. 그리고 지영씨가 왜 꾹꾹 참고 있다가 정신이 나가고 나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. 지영씨의 남편은 참 좋은 남자예요. 이 소설에서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인물이에요. 그런데도 아내가 미치지 전까지 아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.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삶이 바뀌게 될 것을 두려워 해도 주의깊게 들으려하지 않고 육아를 하면서 몰려오는 고독감에 힘들어 해도 다들 겪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죠. 남편이 특별하게 무심하지도 않고 오히려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데도 아내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요. 그리고 할 말 다 하고 살았던 지영씨의 언니의 삶도 지영씨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.  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의 듣고자 하는 의지도 중요하다는 거겠죠.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갑갑해졌었어요.

 영화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인 남자 정신과 의사를 여성으로 바꿔요. 남자는 여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 의사는 지영씨를 치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나 지영씨를 대변해서 남편을 꾸짖기 위해 이 역할의 성별을 바꿨나 봐요. 이 역을 바꾸는 바람에 마지막 이야기를 빼고 지영씨가 카페에서 맘충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나름 시원하게 대거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면서 행복한 성장드라마로 이야기가 끝나요. "말하면 이렇게 세상이 바뀌잖아. 지영씨 같은 사람도 성장해서 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됐어. 너도 말할 수 있어."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어요. 상업영화로서 고구마-사이다 전개가 유행하는 이 시대에 결말에서 다시 고구마를 먹이면서 끝내는 게 어려웠겠지만 이렇게 주제 자체를 바꿔버릴 줄 은 몰랐어요.

 외국인 여자 다섯 명과 그 애들을 따라온 한국인 남자 두 명하고 같이 이 영화를 관람했어요. 외국인들조차 지영씨가 외할머니의 인격으로 친정엄마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때문에 울어서 눈이 벌개져서 나왔는데 남자들이 "내 주변 여자들은 저런 일 겪었다고 하는 사람 없던데...."라고 하거나 "우리 엄마는 저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서 (영화가) 이해가 안 돼. 우리 집은 아침 먹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엄마는 아침도 안 해."라고 해서 정말 갑갑했어요. 영화에서 저렇게 극적으로 보여줬는데도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것을 보니 소설의 결말이 정말 현실적이다 싶었어요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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